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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안 머리 테스트 패턴> RCA, 1939 테스트 패턴은 텔레비전 방송국이 프로그램 방영 이전에 수상기를 조정하기 위하여 방송하는 고정적인 화면이다. 정규 방송 시간을 벗어나면 TV에서 보이던 알록달록한 색의 기하학적인 무늬가 이것이다. TV가 막 가정용으로 보급되던 시절, 화면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시청자가 직접 이를 조정해줘야 했는데, 방송국이 송출해주는 테스트 패턴의 색상 및 음향 표준값에 맞춰 조정 장치를 조작해주면 된다. 말하자면 캘리브레이션 차트인 셈이다. 흑백 TV 시절 미국에서는 시청자들이 위의 RCA 테스트 패턴과 같은 이미지를 띄우고 TV의 휘도와 명도, 화면비 그리고 컬러 밸런스 등을 방송국이 권장하는 기준과 맞는지 확인했다. 아래쪽의 막대들은 프리퀀시 측정용이고 가운데 X는 각각 화질 해상도와 명도를 확인해준다. 중앙의 원의 경우, 초기에 보급되던 디스플레이 기술인 CRT, 일명 브라운관 TV를 위한 것이다. 볼록한 화면 위에 최대한 평면에 가까운 이미지를 보여줘야 하는데, 이 원을 통해 왜곡을 최소화시키는 방식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추장의 머리는 명암비의 디테일을 확인하는 용도라고 한다. 상술한 모든 측정 방식을 모르더라도, 그의 머리가 흐릿하거나 뒤틀어진다면 일반 시청자들도 바로 알 수 있는 지표인 것이다. 다만 왜 아메리카 원주민 추장의 머리를 쓰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SD-ECR-1 컬러바> SMPTE, 1978 컬러 TV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은 SMPTE 컬러바를 더 자주 접했다. 첫번째 줄은 빛의 삼원색인 빨강, 초록, 파랑을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RGB 픽셀 값을 서로 동일한 비율로 섞었을 때 나오는 7가지의 표준 색들을 다룬다. 만일 픽셀의 소자 중 하나 이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 7가지 색들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 순서도 관련이 있는데, 휘도에 제일 영향을 많이 받는 초록을 먼저 조정하고, 그 다음 빨강과 파랑을 조정하라는 의미이다. 두번째 줄은 컬러 밸런스, 세번째 줄은 명암비 조정 용도로 쓰인다. 좌에서 우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화면 조정을 마치고 나면 뒤따를 정규 방송 프로그램에 맞는 디스플레이 세팅이 완료되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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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트 패턴에 대해서 재밌다고 생각되는 점이 몇가지 있는데, 화면 조정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이 한정된 면적 내에 매우 경제적으로 들어가있다는 점, 개인 설정이 불가능해서 지극히 선형적인 방식으로 전국민에게 동시에 테스트 패턴을 송출했다는 점, 그리고 기술적 한계로 인해 일반 시청자들에게 캘리브레이션 역할을 전가했다는 점 등이다. 전문가들이나 이해할만한 도표를 어떤 설명도 없이 내보내고 일반 시청자들이 알아서 화면 조정을 하기를 기대했다는 것인데, 이를 정말로 따른 소비자들이 몇명이나 되었을까 싶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어릴적 오후 다섯시 즈음에 방영하던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 전후로 나오는 이상한 화면 정도로 기억할 듯 하다. 시간의 흐름을 버티지 못한 기술이 집단의 기억 속으로 침투하여 다소 기이한 형태로 남게 된 셈이다. 불가해한 형상과 같이 수반되는 백색 소음, 그리고 정규 프로그램 사이의 공백이라는 특수한 맥락 때문에 테스트 패턴은 공포 영화의 단골 소재로도 활용된다. 레거시 기술이 갖는 향수와 트라우마가 공존하는 것이다. 현재 나오는 대부분의 디스플레이들은 소비자들이 직접 조정할 필요 없이 이미 제조 과정에서 캘리브레이션 적용된 제품들이고, 별도의 화면 조정도 사용 기간 동안에 한 두번 정도만 해도 된다. 좀 더 전문가에 가까운 소비자들은 스파이더 같은 캘리브레이션 장비를 활용하면 매우 디테일한 화면 조정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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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시대에 테스트 패턴은 큰 의미가 없다. 유튜브 프리미어 카운트다운 영상은 바로 이런 아이러니를 노리고 만든 것 같다.
<유튜브 프리미어 카운트다운>, 유튜브 2018 +
테스트 패턴이라고 하면 일본의 미디어 아티스트 료지 이케다의 작품명이기도 하다. 사운드 데이터를 조각내어 이를 이진법 노이즈의 바코드 형태로 시각화하는 설치 미술을 하는 작가인데, 현대 미술의 기준에서도 테크놀로지의 활용 측면에서 최전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테스트 패턴은 일종의 연작인데, 그 중 하이라이트는 약 5천 제곱 미터가 넘는 면적을 가진 뉴욕의 웨이드 톰슨 드릴 홀에서 진행한 <테스트 패턴 N ̊12>이다. 12미터 높이의 수직 스크린과 24미터 길이의 수평 스크린을 결합한 뒤 이 위에다 고출력 프로젝터로 데이터를 흩뿌리는 전시로 일종의 아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관람객들은 이 거대한 글리치 필드 안에 서서 돌아다니거나 엎드려 눕는 등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자신들 위로 쏟아지는 데이터를 받아들인다.
<테스트 패턴 N ̊12> 료지 이케다, 2017 +
일반적으로 내가 사용하는 의미로의 테스트 패턴은 디스플레이의 비교시연을 위한 시퀀스 또는 잔상 실험을 목적으로 하는 영상 루프 등이다. 통제된 실험 환경에서 디바이스를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세워 문제 발생 여부를 체크한다. 이 때 디스플레이의 특성에 따라 발견되는 우위점들 - 예컨대 게임 모드에서의 인풋렉과 화질의 트레이드 오프 정도, 인지적 관점의 응답 속도 등 - 은 기술 소구점으로 수립하고, 반대로 열위점들 - 대표적으로 장시간 동일 화면 노출 시 나타나는 잔상 - 은 개선 알고리즘 개발에 적용된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의 눈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미세한 변화들을 특수 기구들을 사용하여 측정한다. 일반 시청자들이 과거처럼 TV 시청 전에 테스트 패턴을 조정할 것도 아니기에 이런 기술적인 특성들이 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찾아내는 것이 마케터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절대적인 우위를 숫자로 선언하는 것이다. 흔히 뉴메릭 마케팅이라고 하는 수단인데 객관적 데이터에 근거를 둔 상태에서 경쟁 제품과의 차이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숫자로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킨다. 디스플레이 업계로 치면 모니터 스펙에 민감한 게이머들이나 영상 전문가들에게 특히 유효하다. 이들은 특수한 목적에 부합하는 몇가지 필수 조건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체크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정도 수학적 기반을 두고 제품을 바라보기 때문에, 실험 환경에서의 결과는 숫자 자체로도 이들에게 의미를 가진다. 다만 이를 더 광범위한 소비자 집단과 소통하려면, 나는 본 실험이 검증하고자 하는 가설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더 구체적으로, 본 가설이 사람들의 인식 체계와 상관 관계를 맺고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만약 디스플레이의 비트 심도가 10에서 12로 증가되었을 때 이것은 일반 시청자가 체감할 수 있는 계도인가? 체감할 수 있다면 그들이 느끼는 최고치의 계도는 무엇인가? 이것에 근접하는 최적의 비트 심도는 어디까지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기저에 깔려있어야 기술 소구점의 효과성을 전달할 수 있다. 2010년 애플은 레티나 디스플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신규 출시하는 아이폰을 홍보했다. 당시에는 300 PPI 또는 그 이상을 가진 고해상도 스크린을 레티나 디스플레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는 인간의 망막이 인식할 수 있는 최고의 픽셀 밀도가 바로 300 PPI라는 가설에서 따온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이 가설은 틀린 것이었고, 인간의 망막은 300 PPI를 월등히 넘어서는 픽셀 밀도도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또한 단순 수치가 아니라 시청 거리와 화면 크기에 따라서체감되는 픽셀 밀도가 달라진다는 점도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을 소비자들의 머릿속에 정확히 각인시킨 것은 바로 레티나 디스플레이라는 네이밍이다. 300 PPI 이상의 스크린은 인간 시각 시스템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커뮤니케이션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일종의 내적인 벤치마크로 인식하게 만든 셈이다. 테스트 패턴이 직접 스크린 위에 기준값을 그려주었다면,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말하자면 사람들이 머릿속에 탑재하게 된 심리적인 레퍼런스이다. 많은 디스플레이 업계 엔지니어들이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마케팅 용어로 폄하하나, 바로 그 지점이 탁월하다. 실제로 픽셀 밀도의 군축 경쟁은 사실상 종료되었고 대부분의 스크린들이 최적의 픽셀 밀도를 300 PPI로 수렴하는 분위기이다.
<레티나 디스플레이> 애플, 2010 '+'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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